청소년기의 정체감 위기

정체감 위기는 전 생애 가운데 어떤 단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만, 특히 청소년기에 가장 많이 그리고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청소년기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청소년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정신적 과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심각한 정체감 혼란이다. Erikson에 따르면, 자아 정체감의 형성은 청소년기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도 청소년기에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청소년기에 와서 정체감 위기가 왜 가장 크게 문제시되며, 정체감 확립이 중요시되는가? 이것은 청소년기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그들의 정체감 위기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첫째, 청소년기에 들면서 내적 충동의 질적 양적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사춘기의 시작과 더불어 신체 발달과 성적 성숙의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양적 변화와 함께 신체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양적인 변화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질적인 변화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이전까지 비교적 온화하게 유지되어 온 원욕, 자아, 초자아 간의 심리적 역동의 균형이 성적 성숙으로 말미암아 깨어지게 되면서, 이들의 자아는 원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심리적 역동을 조절하고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 단계에서는 아직 발동하지 않았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성적 충동들이 이 시기에 와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고, 남근기적 갈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성 부모에 대한 애정이 동년배 이성 친구에게 지향된다는 점에서 남근기와 차이가 있지만, 이성에 대한 충동이 너무나 강하고 급격하기 때문에 자아가 위협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의 힘을 강화하고 자아의 역동적 구조를 통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심리 역동적인 국면에서 개인의 자아는 자아 통합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자아의 힘이 부족하고 자아 구조를 통합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감에 대한 회의적이고 부정적임과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반문하게 된다. 이것이 곧 그들의 정체감 위기이며, 피할 수 없이 그들 자신의 정체감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할 운명해 처하게 된다.

 

둘째,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상충적인 사회적 요구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아이도 성인도 아닌 이른바 주변인으로서의 존재적 특징 때문에 많은 양면적인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가정에서 그들은 아직 미혼이며 경제적 독립이 성취되기 전인만큼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른들은 나이와 체구에 걸맞게 독립적이기를 기대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역시 Erikson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성인의 책임이 유보되고 있는 이른바 유예기인 만큼 사회문제에 대해 어떠한 관심이나 참여도 하지 않도록 보호되고 경계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문제에 관해 관심과 책임을 갖도록 자극된다. 이와 같은 양면적인 상황적 자극과 요구에 부딪히게 되므로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정체감 위기를 겪게 되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셋째, 청소년기가 되면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는 점이다. 즉, 진학을 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진학한다면 어떤 전공을 택할 것인가, 만일 취업한다면 어떤 직종을 택할 것인가 등의 선택적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잠정적인 결정이든 최종적인 결정이든 간에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들은 아직 완전한 성인은 아니지만, 이전 시기처럼 전적으로 부모나 혹은 다른 성인에 의지할 수만도 없다. 자신의 선택에는 책임이 수반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의 방향이 좌우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과 초조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명쾌하고 신속하게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과 미숙함을 자각하고, 이를 보상하고자 일시적인 강한 성취동기를 갖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와 같은 정체감 위기를 초래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들은 이전까지 느슨하게 생각해 온 자기 자신에 대해 고통스러울 만큼 진지하게 새로운 탐색작업을 퍼 나가는 동시에 자기가 놓인 상황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검하게 된다.

 

넷째, 청소년기에 증대되는 인지능력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청소년기는 인지능력에 있어서 이전 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발달 양상을 보인다. 시간적 제한은 현재에 제한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는데, 이것은 그들의 사고가 현실적 구속을 벗어나 가능성의 세계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인지적 능력의 발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 과정, 예컨대 자신의 위치, 역할, 가능성, 가치 및 이념 등에 대한 검토와 확인, 재규정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예리하고 깊이 있고 다면적으로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청소년들은 다른 어떤 시기보다 자아 정체감 확립과정에서 더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동일시 대상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청소년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심적 참조체계로서 간직해 왔던 이전의 동일시 대상들이 그 유용성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대상을 동일시하거나 이전 동일시 대상들을 새로운 참조체계로 통합하게 된다. 사람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좋아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동일시하여 그들의 행동양식, 기호, 가치 등을 내면화해 가기 마련이지만, 청소년기가 되면서 좋아하는 인물이나 의미 있는 대상이 크게 바뀜으로써 정체감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